제 13회 한강 인도교 폭파 희생자 위령제

김영승 기자 | 기사입력 2019/06/29 [19:08]

제 13회 한강 인도교 폭파 희생자 위령제

김영승 기자 | 입력 : 2019/06/29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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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한강인도교 위령제 실시

 

2019년 그날의 비극을 잊은 채 저렇게 유유히 흐르고 있는데...아직도 잠들지 못한 유혼들은 그날을 고발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과 이승만 독재의 판단에 의해 발생한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으로 숨진 민간인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행사가 29일 한강 둔치에서 열렸다.

  

 

 

1950627일 오후 7시경 충남지사 관저에서 무초 주한미국대사로부터 미국의 지원의사를 전해들은 이승만 독재는 상당히 고무돼 전쟁 이후 처음으로 대 국민방송을 하게 된다. 물론 이승만 독재는 전쟁이 터진 이후 3일동안 자기신변 보호에 급급해 국민들을 챙기지 못한 점도 있었고 미국참전을 알림으로써 국민을 안심시켜야겠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승만 독재의 방송은 전쟁 초기의 혼란상을 극대화해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만서울을 떠나기 전에 녹음을 해두고 떠난 것이 아니라 대전에서 전화로 녹음방송을말이다. 그러나 사전녹음을 했니, 대전에서 전화로 녹음방송을 했니 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이승만 독재가 방송을 결심하고 대전에서 전화를 통해 일단 녹음을 한 다음 방송을 했다 하더라도 불과 4시간 후면 적의 수중에 완전히 떨어지게 될 서울의 사정을 전혀 감안하지 않은 채 오후10시부터 서울 사수 방송 을 했다는 것은 서울시민들이 서울을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빼앗았다는 점에서 분명 중대한 과오이기 때문이다.

 

한강다리(철교 셋과 인도교 하나)의 폭파시간은 28일 새벽230분경. 중앙방송국이 이승만 독재의 방송을 내보낸 후 조선에 의해 접수되던 시각과 거의 같은 시간이다.

 

현재까지 지적되고 있는 한강다리 폭파의 가장 큰 문제점은 피난민 들과 남한군이 다리를 건너고 있는 시점이었다는 점이다. 또 조선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오기도 전에 다리를 폭파하는 바람에 국군의 병력과 장비가 대부분 한강을 건너지 못했고 수많은 시민들이 서울을 떠나지 못해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더욱이 수많은 인파와 차량들이 다리를 지나고 있을 때 폭파를 하는 바람에 수백명의 희생자가 생기기까지 했다.

 

한강다리 폭파는 미국과 이승만이 결정한 것으로. 당시 한강폭파와 관련된 명목상 지휘계통은 신성모 국방장관, 장경근 국방차관, 채병덕 참모총장, 김백일 참모부장, 최창식 공병감 등으로 이어진다.

 

전쟁초기에 빚어진 이승만 독재의 녹음방송과 한강교 조기폭파는 서로 상승작용을 하며 참담한 비극을 만들었고 민심이반에도 크게 작용했다.

  

▲     © 자주일보 김영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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