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 후퇴 - 영화 《 월미도 》

조선인민군 1개 중대가 맥아더의 5만여 군의 상륙을 3일 간 막아낸 월미도

리준무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0/09/18 [23:10]

전략적 후퇴 - 영화 《 월미도 》

조선인민군 1개 중대가 맥아더의 5만여 군의 상륙을 3일 간 막아낸 월미도

리준무 논설위원 | 입력 : 2020/09/18 [23:10]

                               전략적 후퇴 - 영화 《 월미도 》

 

 

 

▲ 영화 <월미도>는 2차 세계대전 승리의 여세를 몰아 우리 조국반도를 단숨에 집어 삼키려는 가당치도 않은 계획을 세워놓고 소위 <연합군>이라 는 이름으로 작당을 해서 쳐들어오는 미국과 추종하는 열다섯 나라의 엄청난 수의 적(敵)을 북조선이 단신으로 막아낸 세계전쟁사에서 있어보지 못한 빛나는 승리를 이뤄낸 전쟁영화이다.   © 리준무 선생

 

1985년 미주지역 통일운동단체인 한겨레운동연합이 주최하는 동포대회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렸다. 이 지역에 살면서 동포대회에 참가한 김병주선생이라는 분이 고려서적잡화쎈타라는 상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북의 서적과 비디오 등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면서 이북 바로 알리기 운동도 펼쳤고 북녘이 고향인 사람들의 향수도 달래주었다. 이때는 이북관련 책이나 비디오를 취급한다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고 주위 분위기는 살벌하였다. 이런 때에 나는 조선예술영화 <월미도>를 감상할 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영화 <월미도>는 2차 세계대전 승리의 여세를 몰아 우리 조국반도를 단숨에 집어 삼키려는 가당치도 않은 계획을 세워놓고 소위 <연합군>이라 는 이름으로 작당을 해서 쳐들어오는 미국과 추종하는 열다섯 나라의 엄청난 수의 적(敵)을 북조선이 단신으로 막아낸 세계전쟁사에서 있어보지 못한 빛나는 승리를 이뤄낸 전쟁영화이다.   

 

이 영화는 맥아더가 이끄는 침략군의 막강한 화력을 단지1개의 인민군 해안포병 중대가 나서서 상륙을 3일간이나 저지시킨 월미도중대(中隊)의 영웅적 투쟁을 형상한 것이다. 월미도를 지키던 해안포병 중대는 낙동강 전선까지 진출한 인민군대가 전략적 후퇴를 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끝까지 월미도를 사수하라는 최고사령부의 명령을 받는다. 이들은 3일간의 치열한 접전을 치르고 모두 장렬하게 전사한다.

 

영화<월미도>는 1982년 리진우에 의해 각색되고 인민배우 조경순이 연출을 맡아서 영화가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월미도 전사들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는가 라는 명제를 놓고 작품이 전개되어 간다. 중대장 리태훈은 정세가 급변할 것을 예기치 못하였다. 다른 부대로 전속 발령을 받고 떠날 줄로 믿고 있던 월미도 전사들 앞에서 중대장 리태훈은 불타는 섬 월미도에 남아서 최후까지 싸울 것을 결의 한다.

 

그런 때에 학교를 갓 졸업한 겨우 17세인 무전수 박영옥이 중대에 배치되어 오는데 영옥은 중대장에게 섬을 3일 동안 사수하라는 사령부의 무전 내용을 전달한다. 중대원들은 어떻게 어린 동무가 이 섬에 오게 되었는가 박영옥에게 물어본다. 영옥은 학교를 졸업하고 동무들과 같이 군대에 가겠다고 일주일간이나 계속 울었더니 허락이 떨어져 여기에 오게 되었다고 장난 섞인 대답을 해준다.  

 

영화<월미도>는 유럽영화에서뿐 아니라 할리우드의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인상적인 전쟁 영화이다. 이북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전쟁영화로 알려져 있는 <월미도>는 세계영화사(史)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진정한 의미의 조국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숭고한 애국적 가치를 높게 다룬 예술적인 영화라는 평을 받고 있다.

 

포탄은 바닥이 나고 병사들은 지쳐 있었는데 시름에 잠겨있는 중대장 리태훈에게 중대를 찾아온 대대장은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이런 격려의 이야기를 해준다. “해방이 된 뒤 우리 광산을 찾으신 수령님께서는 설비가 부족하여 일을 해볼 수가 없다고 하소연하는 광산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으신 뒤 광산 노동자들에게 [인민이 단결하면 못할 것이 없다]라는 자력갱생의 귀중한 가르침을 주셨다”고 중대장 리태훈을 위로 해 준다.

 

조국이란 아득한 옛적부터 선조들이 살아오던 곳, 아버지의 뼈가 묻힌 고향산천, 종달새가 우짖는 정든 곳이라고 대대장은 말한다. 태훈은 대대장에게 그것으로는 어쩐지 부족한 점이 있어 보인다고 말한다. 장군님께서 우리에게 조국을 찾아 주시기 전엔 조국이라는 것에 무슨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는가 조국을 위해 한 목숨 바친다는 것은 장군님을 위해 한 목숨 바치는 것이고 조국의 품은 장군님의 품이라고 역설한다.

 

전세는 점점 준엄해지고 있었고 그날도 전호가에는 노을과 함께 저녁이 엄습해 오고 있었다. 전사들은 고향의 부모형제를 그리며 싸울 비장한 각오를 하며 잠 못 이루고 있는데 어디서인가 조용히 손풍금소리가 울려 나오고 있었다. 영옥은 은은하게 그리고 절절하게 영화주제가 <나는 알았네>를 부르기 시작한다.

 

첫날 전투에서 발생한 희생자를 떠나 보내는 자리에서 중대장 태훈은 “오늘 우리는 가장 가까웠던 우리의 동무들과 영원한 작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무엇 때문에 그리고 무엇을 위해 서슴없이 불타는 청춘과 목숨을 바쳤는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장군님께서 찾아주신 고마운 조국을 위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바쳐야 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엄숙한 선포를 한다.

 

전사들은 이런 말들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모두 전사한다. 그들은 마지막 남긴 편지에서 이렇게 절규 하였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 행복은 누리는 것보다 행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

 

이어서 그들은 김일성 최고사령관에게 이런 글을 남기었다.

“우리는 죽습니다. 그러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명령대로 조국의 월미도를 지켜냈습니다.

김일성장군 만세! 조국이여 번영하라!”

 

김일성주석은 그 때를 이렇게 회고 하였다.

”월미도 해안포병들이 잘 싸웠습니다. 그들은 최고사령부의 명령대로 인민군대의 전략적 후퇴를 보장하기 위하여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결사적으로 싸워 3일 동안이나 적들의 상륙을 막아 냈습니다. 우리는 월미도 용사들의 영웅적 위훈을 잊을 수 없습니다.

                                                          -김일성-

 

이북 최고의 세계적인 남성배우 고 최창수가 연기한 마지막 장면은 이북영화사상 길이 남을 명 장면 중 하나라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무전수 박영옥 (윤수경)을 더 잊지 못하고 있다. 영옥이 부른(가수 최삼숙의 노래) 이 영화의 주제가 <나는 알았네>는 오늘도 이북과 이남 해외에서까지 세대와 세대의 차이를 넘어 인기 곡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단순히 노래가 아름답고 부르기 쉬워서만이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이 너무나 크고 시사하는 교훈이 뼈에 사무치기 때문이리라 그 감동을 전동우의 가사에서 진하게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영화에서 느낀 감동의 주제음악을 중심으로 특히 가사가 주는 감동을 같이 나누어 보려고 한다.

명가사에서 명곡이 나온다고 말한 김정일위원장의 명언은 다음에서 확연하게 느껴볼 수 있다.

 

나는 알았네     전동우 작사, 라국 작곡

봄이면 사과꽃이 하얗게 피여나고

가을엔 황금이삭 물결치는 곳

아- 내 고향 푸른들 한줌의 흙이

목숨보다 귀중한 줄 나는 나는 알았네 

 

불타는 전호가에 노을이 비껴오면

가슴에 못 잊어서 그려보는 곳

아-내 고향 들꽃 피는 그 언덕이

둘도 없는 조국인줄 나는 나는 알았네 

 

살아도 그 품속에 죽어도 그 품속에

언제나 사무치게 불러보는 곳

아-어머니라 부르는 나의 조국이

장군님의 그 품인 줄 나는 나는 알았네

 

심오한 철학적 사색이 담긴 전동우(1931.4.20∼1999.10.9)의 시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없이 틀어 잡는다. 함경남도 금야군 새 동리 빈농 가에서 출생. 1954년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를 졸업한 후 조선작가동맹에서 사업. 1959년부터 함북 성진제강소 현지파견작가로 사업. 1960년부터 평양문학대학과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창작지도교원, 1972년부터 조선영화문학창작사 가사창작실 실장. 시집 《청춘》(1961), 서사시 《인간의 노래》(1964), 시론 《서정시창작수업》(1964)을 각각 발표. 그는 노래가사와 함께 서정시, 서사시, 정론, 수필, 평론 등의 작품을 남겼다.

 

작가라면 누구나 자기 생애에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명작들을 내놓기를 바랄 것 이다. 영화의 노래와 가요를 통하여 인민들과 각별히 친숙해진 전동우는 생애에 가사 250여 편을 창작했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남긴 명가사들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영혼을 태우고 뼈를 깎는 노력을 하며 쓴 것이었다. 그는 늘 가사에는 문학적 발견이 있어야 하고 철학적인 생활을 가사에 담아야 한다고 강조 하였다. 어머니조국의 귀중함을 뼈에 사무치도록 절감한 시인의 심장의 노래인 《나는 알았네》(1982) 는 지금도 우리 마음에 깊은 충격을 주고 있다.

 

이런 전동우의 가사가 있었기에 작곡가 라국은 인민들의 심장에 호소하는 서정적인 명곡을 써낼 수가 있었겠다 는 생각이 든다. 미국땅에 1989년 5월10일 전동우작사 라국작곡 <나는 알았네>를 음악회의 중요 종목으로 무대에 올려 놓게 되었다. 뉴욕의 공연장에는 사상처음으로 열리는 북조선 가곡이 교포들에게 선보인다는 신문방송의 대대적인 기사 때문에 극장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피아노 반주도 현지인 뉴욕의 입맛에 맞게 편곡하였다. 창법도 서양식 발성을 하여 영화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지만 청중들은 한없이 행복스러워 했다. 고향의 노래를 듣자고 네 시간이나 운전하고 왔다고 하며 좋아서 내 손을 꼭 붙잡고 흔들어 대던 그 노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공연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성과는 말할 수 없이 컸다.

 

그 뒤 미주민족문화연구회를 통해 라국선생이 우륵심포니에 맞는 편성으로 편곡한 <나는 알았네>를 보내왔다. 2001년 북부조국에서 온 다섯 명의 음악인과 미국 순회공연을 할 때에 선생이 편곡한 악보를 긴요하게 사용 하였다. 음악회를 찾아온 교포들은 이 사연을 알고 있는 듯 하였고 음악회장은 도시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

 

라국은 서울음대에 재학 중인 1950년 전쟁시기에 북으로 간 음악가이다. 그는 남에 있을 때는 교향악단에서 바순(Bassoon)을 연주 하였고 입북한 다음 영화음악 작곡으로 많은 공헌을 하였다. 영화 및 방송음악단에서 수 많은 영화음악을 작곡하였고 수많은 히트곡을 써내며 음악가로 꿈을 펼치며 살다가 90년대 초 작고했다.

 

 

오늘도 북조선은 미국과 첨예한 대결 전을 벌이며 민족의 존엄성을 굳건하게 지켜나가고 있다. 대결의 양상은 달라졌어도 제국주의세력의 근본적인 전략은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오늘 북조선이 월미도 전투에서 보여준 간고한 애국적 투쟁정신은 제국주의 세력들과의 대결 전에서 기어이 위대한 승리를 견인해 오고야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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