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헌신적 사랑

김정숙여사의 관념 속에는 “자기”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김현환 박사 | 기사입력 2020/09/23 [16:26]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헌신적 사랑

김정숙여사의 관념 속에는 “자기”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김현환 박사 | 입력 : 2020/09/23 [16:26]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헌신적 사랑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 자주일보

 

9월22일은 김정숙 어머니의 서거일이다. 김정숙여사는 1917년 12월24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조선혁명을 위하여 가장 충실하게 헌신하다가 1949년 9월22일 31세의 젊은 나이로 서거하였다. 김정숙여사는 김일성주석의 가장 친근한 반려자였고 동지였고 제자였으며 전사였다. 김일성주석은 항일혁명시절을 추억할 때마다 김정숙여사를 자주 회고하였다.

 

김일성주석과 김정숙여사는 혁명하는 과정에 서로 알게 되었고 백두산을 넘나들면서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는 사이에 벗이 되고 동지가 되고 한생을 같이하는 부부가 되었다. 김주석이 김정숙여사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다홍왜회의를 하던무렵이었다. 그때 김주석은 삼도만 능지영이라는 곳을 방문했는데 그곳에 당비서처가 있었다. 김정숙여사는 그 비서처에서 일하고 있었다. 김주석은 능지영에서 소집된 비서처일꾼들의 회의장소에서 김정숙여사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후 김주석은 마안산에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에 편입된 김정숙여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거기서 김주석은 김정숙여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듣고보니 김여사는 의지할 데없는 고아신세였다. 그녀가 믿고 의지할 곳이란 혁명전우들의 품밖에 없었다.

 

김정숙여사가 사령관 부대로 온 후 무송현성 전투가 있었는데 거기서 그녀가 여투사로서의 담력과 지략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김주석이 무송현성 전투에서 살아난 것도 김정숙여사의 덕이었다고 김주석은 회상했다. 이 전투가 있은 후부터 그녀는 더욱더 전우들의 총애를 받는 인물로 되었다. 이듬해 3월에 무송원정을 떠났는데 무송원정이 참으로 힘든 원정이었다. 그때 김주석은 육체적으로 참으로 힘들었다. 밤이면 대부분의 대원들이 다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러나 김정숙여사만은 우등불곁에서 온밤 자지 않고 대원들의 해진 옷을 손질해주었다. 행군길이 너무 험하다보니 옷이 쉽게 해졌다. 신입대원인 마동희동지도 그 원정에 참가했다가 우등불에 모자를 태웠는데 김정숙여사가 새것처럼 기워주었다.

 

김정숙여사는 무슨 일거리든지 손에 잡기만 하면 온 힘을 다 바쳐 맵시있게 마무리를 해놓군 하였다. 그날 밤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김주석은 탄복하였다. 남을 돕지 않고서는 잠을 자지 못하는 그 남다른 성품과 인정미에 김주석은 감동하였다. 김정숙여사는 도천리지하공작조에 포함되어 도천리와 신파일대에서 많은 일을 해놓았다. 김주석은 바로 그때 김여사에게서 혁명가로서의 유능한 수완과 능력을 발견하였다고 추억했다. 그녀에게는 군중을 감화시키고 각성시키고 동원시킬줄 아는 비상한 솜씨가 있었다고 김주석은 기억했다. 그녀는 한몸을 내대고 일한 결과로 인민들한테서도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한몸을 내대고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무엇이 두려우랴 하는 배심을 가지고 일하였기에 위험한 고비에 부닥쳐도 살아날 수 있었다고 김주석은 믿었다.

 

김정숙여사는 인간을 열렬히 사랑하였다. 그녀는 남을 위한 희생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다. 동지들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해내는 것이 그녀의 성품이었다고 김주석은 평했다. 김정숙여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지들을 위해 한생을 살았다고 김주석은 지적했다. 그녀의 생애는 <동지애>로부터 시작되었고 동지애를 기초로 하여 발전하였으며 그 과정에 “공산주의적 도덕의리”가 최대한으로 발양된 비범한 혁명가로 되었다고 김주석은 생각했다. 그녀가 일생동안 해놓은 그 모든 것은 다 동지들을 위하고 인민을 위하고 혁명을 위한 것이었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고 김주석은 토로했다.

 

고 김주석은 보았다.

 

“나는 굶어도 좋고 얼어도 좋고 아파도 좋다, 그러나 동지들이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고 아프지 않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다, 내가 죽는 대가로 동지들을 살릴 수 있다면 나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웃으면서 죽음의 길을 택할 것이다” 하는 것이 바로 김정숙여사의 <인생관>이었다고 김주석은 판단했다.

 

김정숙여사의 <동지애>는 김일성주석을 위한 노력, 김주석을 위해 자기를 깡그리 바친 헌신성에서 제일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고 김주석은 평가했다.. 자기 사령관에 대한 충실성도 그 본질은 동지애라고 말할 수 있다. 김정숙여사는 여러번 김주석을 위기에서 구원해주었다. 그녀는 김주석의 신변안전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육탄이 될 준비가 되어있었다. 여러 치열한 전투에서그녀는 여러번 몸으로 김주석을 막아서며 달려드는 적들을 총으로 쏘아 물리쳤다.

 

어느해 겨울 김정숙여사는 김주석의 옷을 빨아서 자신의 몸에 품어 말린 적이 있었다. 옷가지를 몸에 띠고 말리웠다는 말을 난생처음 들은 김주석은 아연해서 김여사를 사령부로 불렀다. 너무나 얼어서 얼굴이 파랗게 질린 그녀를 보고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생전에 자신의 어머니도 해보지 못한 일을 그녀가 했다는 생각을 하니 김주석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친 어머니도 해주지 못한 일을 스스로 걸머지고 나서서 자신을 희생시킨 김여사의 동지애, 생각해보면 그것은 자기 사령관에 대한 혁명적인 동지애인 동시에 인간 김일성에 대한 뜨거운 정이기도 하였다고 김주석은 회상했다. 김정숙여사는 몸으로 김주석에게 날아오는 총탄도 막아주고 눈비도 막아주고 촉한도 막아주었다.

 

항일혁명투사들은 혁명 뿐 아니라 “사랑”에서도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생활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간고했지만 백두산 위에서도 남녀의 끈끈한 사랑은 있었다. 부모자식간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연인간의 사랑, 사제간의 사랑, 동지간의 사랑을 비롯하여 인간생활에 존재하는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헌신성”이라고 김주석은 보았다. 자기는 굶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굶지 않게 하며 자기는 춥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춥지 않게 하며 자기는 아프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불 속에도 들어가고 형틀 앞에도 나서고 얼음 속에도 뛰어드는 그런 “자기 희생적인 헌신성”만이 가장 “아름답고 숭고하고 진실한 사랑”을 창조할 수 있다고 김주석은 믿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산에서 싸울 때는 <결혼식 상>이라는것을 몰랐다. 생활이 간고하고 어렵기도 하였지만 나라를 찾지도 못하고 망국민의 수치를 씻지도 못한 처지에 유격대원들이 어떻게 결혼식이나 생일잔치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유격대오에는 그런 호사를 바라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유격대식 결혼”이라는 것이 아주 간단했다. 대원들 앞에서 오늘 아무개 동무와 아무개 동무가 결혼을 한다고 선포하면 그만이었다. 지금의 청년들처럼 첫날 옷을 차려입고 큰 상을 받는 것 같은 예식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좀 괜찮은 경우라야 밥 한그릇이 고작이고 밥이 없으면 죽을, 죽이 없으면 감자나 강냉이 같은 것을 나누었다. 유격대원들은 그때 부부로 선포된 다음에도 소속 중대나 소대에서 종전과 같이 생활하였다. 지휘관이라고 해도 예외가 없었다. 결혼을 하자마자 싸움터에 나갔다가 전장에서 쓸어진 부부가 있는가 하면 서로 다른 임무를 맡아가지고 따로따로 떨어져 생활하는 동무들도 있었다.

 

김일성주석과 김정숙여사가 결혼하던 날 전우들은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마련해보려고 하였으나 아무 것도 구하지 못하였다. 온 부대가 식량이 떨어져 끼니도 잇지 못하는 때라 아무것도 없었다. 첫날 옷도 큰 상도 주례도 둘러리도 없었지만 그 혼례가 한평생 잊혀지지 않았다고 김주석은 추억했다. 김정숙여사도 생전에 그날을 두고두고 추억했다고 한다.

 

김일성주석은 백두산밀영과 원동의 훈련기지에 있을 때 조국이 해방된 다음 전우들의 결혼식을 잘해주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방은 되었으나 인민들의 살림살이도 넉넉하지 못하고 식량사정도 좋지못하여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혁명투사들이 해방된 조국에 와서 결혼을 많이 했지만 다들 식은 소박하게 했다. 김주석은 그게 늘 마음 속의 그늘로 남아 있었다.

 

김정숙여사는 해방 후에도 지성을 다해 김주석을 받들어모셨다. 김정숙여사의 한생은 김주석을 위해 바친 한생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고 김주석은 회상했다. 그녀는 김주석과 결혼한 다음에도 시종일관 그를 “사령관으로, 지도자로, 수령”으로 내세워주고 받들어주었다. 김주석과 김정숙여사와의 관계는 “수령과 전사와의 관계”, “동지와 동지사이의 관계”였다고 김주석은 말했다. 김정숙여사는 늘 자신을 “수령의 전사”라고 하였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날까지 김주석에게 보통 집안에서 쓰는 “여보”같은 호칭을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주석을 부를 때에는 그저 <장군님>이라고 하든가 <수상님>이라고만 하였다고 김주석은 추억했다.

 

김정숙여사는 일생동안 고생만 하다가 서거했기에 보내는 것이 너무도 가슴아파서 그녀와 영결할 때 김주석은 손목에 시계를 채워서 보냈다. 할머니가 손자며느리인 김정숙여사를 위하여 사준 시계였다. 한평생 동지들과 인민들을 위해 모든 것을 송두리채 바치고 세상을 떠나간 김정숙여사였지만 자녀들을 위해서는 한푼의 돈도 재산도 남기지 못했다. 그녀가 소비한 돈은 김주석이 다달이 받은 생활비였고 그가 사용한 집과 가구들은 다 나라의 것이었다.

 

그러나 김정숙여사는 큰 유산을 남기었으니 그것은 김정일위원장을 미래의 영도자로 키워 당과 조국 앞에 내세워준 것이었다. 사람들은 김주석이 김정일위원장을 후계자로 키워냈다고 하지만 사실 그 기초는 김정숙여사가 쌓아놓은 것이라고 김주석은 높이 평가하였다. 그녀가 혁명 앞에 남긴 가장 큰 공로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김주석은 보았다. 김정숙여사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에도 김정일위원장을 불러앉히고 그에게 아버지를 잘 받들라는 것과 아버지의 위업을 계승완성해야 한다는 것을 당부하였다고 김주석은 추억하였다. 그것은 그녀가 김정일위원장에게 남긴 유언으로 되었다. 그 유언을 남긴 후 3시간이 지나서 김정숙여사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 그때가 1949년 9월22일이었다. 김정숙여사는 김일성주석의 가장 충실한 혁명동지였고 제자였고 전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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