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회고한다.(7) - <중대장동지 구출작전>

김영승 선생님의 빨지산 회고록

김영승 기자 | 기사입력 2020/10/08 [07:39]

과거를 회고한다.(7) - <중대장동지 구출작전>

김영승 선생님의 빨지산 회고록

김영승 기자 | 입력 : 2020/10/08 [07:39]

과거를 회고한다.(7)

 

<중대장동지 구출작전>

 

▲ 우리 전남부대는 1중대와 3중 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체계는 부대장, 정치위원, 참모장. 강사, 중대는 중대장 부중대장 정치지도원 및 대원들이다. 1중대는 전투 중대이고 3중대는 후방중대다. 그러나 적정에 따라 1중대는 부대장이, 3중대는 참모장이 책임지고 분산투쟁과 합동 투쟁을 지휘한다. 사진은 서울에 진입한 조선인민군 병사들이다.  © 김영승 기자

 

여기는 백운산 전남도당 빨찌산 진지다. 때는 19539월 중순이다. 산간지대에도 가을은 찾아왔다. 들판에는 땀흘려 가꾼 곡식들이 태풍의 피해 없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백운산 전남부대는 광양 진월면으로 보급사업을 나갔다. 당시 경찰대들은 빨찌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10여 명씩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나 부락 뒤에 잠복하는 상태 속에서 보급사업을 나갔던 것이다.

 

우리 전남부대는 1중대와 3중 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체계는 부대장, 정치위원, 참모장. 강사, 중대는 중대장 부중대장 정치지도원 및 대원들이다. 1중대는 전투 중대이고 3중대는 후방중대다. 그러나 적정에 따라 1중대는 부대장이, 3중대는 참모장이 책임지고 분산투쟁과 합동 투쟁을 지휘한다.

 

1중대는 88 건위대 소속 전투원들이고 3중대는 전남연대 당시 성원들과 도당 각부서 지도원 출신들로 구성돼 있었다. 88건위대는 스무 살 전후의 나이로 왕성한 활동력을 가진 도당 간부들의 보위병 출신들이었다.

 

드디어 부대는 마을에 진입했다. 필자는 마을로 들어오는 통로에 매복을 책임지고 있었다. 당시 우병철 1중대장은 마을 한복판에 진입하다 적의 매복에 걸렸다. 결국 마을에 진입해 들어가던 중 적의 집중사격을 받아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매복조는 마을에서 콩 볶듯 총소리를 들으면서 경각성을 높이고 있는 가운데 총소리가 좀 잦아들자 잠잠한 틈을 타서 후퇴한 부대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마을을 향하여 돌격하라는 아지프로와 함께 M1을 연발로 발사하는 순간에 부대는 후퇴하여 마을 뒤 산기슭에서 호응하는 총소리를 듣고 부대 위치를 확인한 후 부대 위치로 달려가고 있는데 마을 한복판에서 칼빈총을 쏘면서 빨리 돌격하라는 중대장 목소리를 듣고 필경 중상을 당하여 움직일 수 없는 상태 속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목소리임을 직감했다.

 

부대와 합류한 직후 부대장에게 빨리 돌격전을 전개하여 적들을 몰아내고 중대장 구출 작전을 전개하자고 제기했다. 그러나 부대장과 정치위원은 들어가다 아까운 동지들만 희생되니 구출 작전은 불가하다고 했다. 그때 나는 지금 사선에서 구출을 호소하고 있는데 어찌 그냥 철수할 수 있느냐고 했다. 더 나아가 나는 강력히 주장하면서 대원 동지들에게 내가 앞장에 설 터이니 내 뒤를 따를 동지들이 있으면 나오라고 하니 몇 명의 동지들이 나왔다.

 

이때 부대장 동지는 대원 동지들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 후 3중대 조사선 동지가 기운이 제일 세기 때문에 중대장 동지를 업고 나오도록 명령하고 나를 비롯한 1중대 5명이 동원되어 구원의 가냘픈 목소리를 들으면서 일제히 돌격의 목소리와 함께 집중사격을 가하면서 중대장 동지의 위치를 확인하고 마을에 진입하며 고삿(골목의 우리 옛 말))길을 따라 중대장 있는 곳까지 무사히 진입하였다.

 

적들은 겁을 먹었는지 마을 뒤로 후퇴하면서 사격을 가하고 있었으나 우리가 중대장 동지를 구출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았다. 중대장 동지는 마을 집 울타리 밑에 은신해 있으면서 총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또 적들은 캄캄한 밤이라 접근을 못 하고 있었다.

 

중대장 동지는 허벅다리 뼈가 부러져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리 돌격조는 중대장 동지를 재빨리 조사선동지의 등에 업히고 두 동지 호위 속에 부대 진지로 달려갔고, 우리 돌격조는 적을 한 군데에 묶어놓고 있다가 감쪽같이 후퇴하여 무사히 부대 진지로 돌아와 대오에 합류하였다. 이렇게 구출한 중대장 동지를 임시로 담가를 만들어 태우고 백운산 진상골 부대 본부에 무사히 도착했다. 날이 새자 중대장 동지는 서 골의 환자트(치료소-환자를 치료하는 아지트’)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중대장 동지는 환자치료소에 있으면서 자기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차고 있던 시계를 나에게 선물로 보내왔으며, 그 시계를 1954년 체포될 때까지 차고 있었다.

 

(西) 골의 환자트는 195312월 초순에 적들의 수색작전에 드러나게 되어 모두 체포되는 불운의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그때 중대장 동지는 생포되어 남원 수용소에 수용이 되었으며 나와 중대장 동지는 그곳에서 만남을 가졌다. 군법에서 5년 형을 선고받고 전주 감옥으로 갔다는 소식만 듣고 그 후 지금까지 중대장 동지의 소식은 모르고 있다.

 

다시 1953년에 서(西) 골의 환자트에 지하선이 발각되어 살 수 없게 되자 모자(母子)가 함께 입산하여 환자트에서 환자들 간호에 열중하다 할머니는 체포돼 적들에게 끝까지 반항하다 희생되었고, 아들만 살아 남아 체포되어 수용소에 들어왔다가 석방되었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환자트에서 할머니만 사살되고 모두 생포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환자트는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그때만 해도 적의 총탄은 내 몸을 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투쟁했다. 생사를 넘나들며 투쟁하다 한 줌의 흙으로 산화하여간 동지들을 회고하면서 필자도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어떻게 마감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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