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들의 묘소 참배 및 곡절 많은 혁명생애에 대하여-2

불굴이 투사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생을 마치는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

김영승 기자 | 기사입력 2020/11/03 [13:06]

비전향 장기수들의 묘소 참배 및 곡절 많은 혁명생애에 대하여-2

불굴이 투사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생을 마치는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

김영승 기자 | 입력 : 2020/11/03 [13:06]

비전향 장기수들의 묘소 참배 및 곡절 많은 혁명생애에 대하여-2

 

 

불굴의 애국투사인 송병록 동지를 추모하면서

 

  © 김영승 기자



송병록 동지는 경북 김천에서 출생했다.

 

19세에 초등학교 선생을 하면서 반미 투쟁을 하다가 인천 감옥에서 복역했다.

1950년 조국전쟁 때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양강도 산림대학을 졸업하고 당 기관에서 근무했다.

1969년 박재원 동지와 함께 내려 왔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받았다.

1972815일에 서대문 감옥 사형장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불굴의 투사인 송병록 동지시여!

 

조국과 인민의 부름에 사선을 뚫고 한걸음으로 달려내려 와 조국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뜻을 이룩하지 못하였으나 조국의 재단에 받친 동지의 희생은 청사에 빛날 것이며, 대를 이어 아로새길 것이니 모든 아픈 시름을 내려놓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기리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11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이학돌 동지를 생각하면서

 

  © 김영승 기자

 

 

이학돌 동지는 1927년 경북 김천에서 출생했다.

19304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군에 의해 건국 간부교육을 받기도 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고향으로 귀가했다 (당시 18)

해방을 맞아 국가 건국사업에 관심을 같고 조선 공산당 경북도당에서 활동하면서 4610월 대구 인민 항쟁에도 참여했다.

1948년 단독정부 수립 후 실시된 남북 총선거 청도지역 투표함을 해주로 이송하기도 했다.

그후 강동정치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남으로 내려와 결혼하여 4남을 두었다.

1972년 통일혁명당 경상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18년의 형기를 마치고 1990년에 출옥했다.

출옥 후 아파트 관리원으로 근무하면서 6.15공동선언 대구경북본부 고문 등을 역임하면서 각종 집회나 기자회견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2015121488세를 일기로 운명하고 말았다.

 

이학돌 동지시여!

 

동지의 80여 성상을 회고 볼 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의 사회는 본질이 하나도 바뀌지 않은 현실을 직시할 때 선배 열사들의 발자취를 따라 열심히 투쟁하여 75년째 둥지를 틀고 있는 미제를 몰아내 자주적인 통일 세상을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것을 동지의 영전 앞에 굳게굳게 다짐합니다. 이제는 모든 아픈 시름을 내려놓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11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김태규 동지를 추모하면서

 

  © 김영승 기자

 

 

김태규 동지는 출옥 후 대구에서 생활하다가 운명했다. 동지의 이력에 대해서는 남은 동지가 남긴 기록이 없고 기록을 받은 사람도 아직은 알려지지 않았다. 앞으로 알게 되면 발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필자가 아는 범위에서 기제 한다는 것을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우선 1950년 조국전쟁 발발 직전에 해주에서 37명의 유격전사들이 배를 타고 남하하다가 배가 고장이나 수리를 하기 위해서 중국 상해로 가서 약 1개월 동안 체류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 체류하다 보니 불평하는 대원들이 있어 그 상황을 눈치채고 떠났는데 망망대해에서 또 한 달간을 해상에서 지내다 보니 가진 식량이 다 떨어져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있는 대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영광군 염산면 바닷가에 정박하고 상륙했다. 성원들 가운데에 책임적인 지위에 있는 동지의 누이동생이 사는 집을 찾아가 우선 밥을 시켰다. 그런데 누이 남편이 군부대에 신고하여 군경 부대들의 포위 작전 속에서 37명 중 7명만이 살아 1950723일 해방을 맞이했다. 나머지 30명은 모두 희생되고 마는 아픈 역사의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그리고 전방 보초를 서로 나간 두 동지는 만일 적정(敵情-적들의 정세)이 나타나면 자폭으로 신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보초를 섰다. 적정이 나타나자 실제 자폭하여 적정의 상황을 알리는 신호를 남기고 한 줌의 흙으로 산화하여간 동지들을 생각하면 일생을 밤잠을 설치고 있다. 현재까지 살아남아 건강상태가 오늘내일하고 있는 할머니의 말씀이다. 김태규 동지도 살아남은 7명 중 한 사람 이었다. 현재 살아 있는 분은 임복현 할머니 뿐이다.

 

 

1952년 지리산 빨찌산 투쟁속에서 아는 몇 가지를 소개한다.

 

이현상 부대는 총참모장이 전사한 후 박종하 부대와 김지회 부대로 명칭을 따서 부르고 있었다. 따라서 김택유 동지는 김지회 부대 부대장으로 투쟁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적과의 투쟁 속에서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자 결국에는 박종하 부대는 없어지고 김지회 부대만 남아 있다가 1953년에 해산되었다. 그 후 김택유 부대장은 제5지구당 특수부대장으로서 지도부를 보위하면서 소조투쟁을 전개했다.

 

1953년 여름에 빨찌산 토벌에 올라와 꽃대봉(현재 지도에는 토끼봉)능선에 진을 치고 있는 서남지구 경찰대 일개 대대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당시 제5지구 당이 빗점골의 왼쪽 골짜기에 아지트를 쓰고 있을 때였다. 김택유 소조는 국군으로 가장하고 백주에 능선에 올라 꽃대봉(지금은 토끼봉)까지 무사히 통과했다. 이 토끼봉에는 경찰대장이 있었다. 우리 인원은 부대장과 대원2명이 함께했다.

 

눈치를 첸 경찰대장과 대치국면이 조성되었다. 이때 우리는 총구로 겨누고 있고 경찰대장이 허리에 찬 권총을 빼려고 손이 가면 김태규 부대장은 빼든 권총으로 쏘겠다고 위협하는 광경이 벌어졌다. 더이상 지체하면 불리하기 때문에 옆에서 총구를 겨누고 있는 동지들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도 위협을 주려는 듯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느 순간 위험함을 알아차리고 경찰대장을 향해 발사했다. 드디어 경찰 대장이 넘어지면서 자기 권총을 빼 발사한 총알이 김택유 동지의 눈을 관통하였다.

 

그래서 한쪽 눈이 실명되는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능선에 진을 치고 있던 전투 경찰대원들을 생포하여 무장을 해제시키고 토기 봉에 올라간 부대장의 무사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부관(이현상 동지 안전을 책임진 여수 14연대 출신) 동지는 고지에서 나는 총소리를 듣고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포로들을 모두 돌아가라고 풀어주었다. (총은 이미 다 회수하고 있었음)

 

당시에 벌였던 투쟁의 전과는 당시 빨찌산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그 후 김택유 동지는 체포되어 남원수용소에 있다가 군법재판에서 사형을 받지 않고 전주감옥으로 이송되어갔다. 그 후 비전향을 고수하지 못하고 여러 감옥을 거쳐 출옥해 대구에서 생활하다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김택유 동지시여!

 

동지의 파란만장한 생을 돌이켜보면 우리의 투쟁목표를 향해 가는 길이 암흑 속에서 비추어주는 한 줄기의 빛과 같아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넘어야 할 산이 너무도 많다 보니 때론 방황도 하고, 지체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초심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다만 일관되게 목적을 관철하는 과정에서 끝을 맺는 과정에서 변함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 것 어찌할 수 없군요. 이젠 지난날의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으시고 영생하기만을 바랍니다.

 

2020111일 전국 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최동권 동지를 생각하면서

 

  © 김영승 기자


최동권 동지는 함경북도 온성군 훈융면에서
1937324일에 출생했다.

 

인민군 해안 경비대에 근무할 때인 19648월 이전에 남하한 공작원을 북상시키기 위해서 부산과 진해 사이 접선 장소에 갔는데 적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매복하고 있던 군경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일행 5명중 4명은 희생되고 최동권 동지만 부상을 당하여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15년 형을 선고받고 대전 대구감옥에서 복역 중 1988년에 출옥했다. 출옥 후 대구 갱생보호소에 6개월 있다가 대구시 곽병원 보일러 시설에 취직하여 1997년 정년 60세까지 근무했다. 이후는 여성병원 덕영치과 보일러실에서 4년을 근무하고 2014년에 간암이 발생하여 1년간 치료받다가 2015816일에 자택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시신은 화장 후 성주군 선남면 우성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최동권 동지는 곽병원에 근무할 때 결혼하여 11남을 두고 부인은 20145월에 작고하는 아픔을 겪었다.

 

고향 평양의 부친은 일찍 돌아가시고 3남매가 살고 있다고 한다. 최동권 동지는 출옥 후 대구 범민련 양심수후원회, 민자통에서 활동했다. 평양에 있을 때는 나이가 어려 인민군에 입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이를 올려 인민군에 입대하였다고 한다.

 

최동권 동지시여!

 

조국통일 전선에서 생사를 같이하던 금싸라기와 같은 동지 4명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부상을 입고 생포되어 적지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살면서 항상 희생된 동지들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동지의 심정을 동지들이 아니고는 제대로 알 수 없었으리라고 봅니다. 동지마저 적지에서 살아생전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묻히고 마는 한을 살아 있는 우리 당대와 후대들이 잊지 않고 마음에 깊이 새기며 반미자주화 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할 것을 동지의 영전에 굳게 다짐합니다. 모든 아픈 시름을 다 내려놓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11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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