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수들의 묘소 참배 및 곡절 많은 혁명생애에 대하여-3

조국 통일의 길에 한 몸 바치신 장기수 선생이시여 이젠 편안히 쉬소서

김영승 기자 | 기사입력 2020/11/04 [16:30]

장기수들의 묘소 참배 및 곡절 많은 혁명생애에 대하여-3

조국 통일의 길에 한 몸 바치신 장기수 선생이시여 이젠 편안히 쉬소서

김영승 기자 | 입력 : 2020/11/04 [16:30]

장기수들의 묘소 참배 및 곡절 많은 혁명생애에 대하여-3

 

 

박재원 동지를 생각하면서

 

▲ 박재원 동지시여! 동지는 가고 없지만 남아 있는 가족들과 후대들은 동지가 이루지 못한 참뜻을 올 곧게 이어받아 안고 반미자주화 불길을 지펴갈 것이니 모든 아픈 시름을 내려놓으시고 평안히 잠드시며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기리 영생하기 바랍니다.  © 김영승 기자

 

박재원 동지는 1930120일 경북 영천시 괴연동에서 소작농의 4남매 중 셋째로 출생했다.

재원 동지는 고향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에 서울로 상경하여 덕수상고 야간부에 다니다가 1950년 조국전쟁을 맞이했다.

9.28 후퇴를 맞아 평양 강계를 거쳐 심양까지 피난했다.

심양에서 3년간 인민군 기술학교에 다녔다. 그 후 자동차 부대 기술 교육을 받고 1953년에 평양으로 돌아와 인민군 기계화 부대에서 근무했다.

1956년에 제대하여 황해도 송림제철소에서 근무했다.

1959년에 결혼하여 딸 3형제를 두었다.

그 후 황해도 인민위원회에서 근무하다 1964년에 중앙당에 소환되어 활동하는 중에 1969년 송병록동지와 함께 내려왔다가 둘 다 체포 되었다.

체포 후 재판에서 송병록 동지는 사형을 선고받고 사형을 당하였으며, 박재원 동지는 무기형을 받고 대전, 대구 등에서 복역했다.

19891224일 소위 성탄특사로 20년만에 출옥하게 되었다.

출옥 후 1990년에 해직된 활동가에게 60년대 공화국의 교육, 보건, 농촌기계화 현황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이 화근이 되어 남산 대공분실로 끌려가 8개월간 불법 구금상태에서 고문을 받는 고초를 겪기도 했었다.

2004년 장기수 제 2차 송환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하여 송환을 강력히 촉구하기도 했었다.

2006년부터 6.15공동선언 대구, 경북 위원회 고문과 대구경북 진보연대 고문으로 활동했다.

201791일에 고문 후유증으로 송환의 뜻을 이룩하지 못한 채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남은 가족은 부인과 조카 그리고 여러 남매를 두고 있다. 시신은 대구 시립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박재원 동지시여!

 

동지는 가고 없지만 남아 있는 가족들과 후대들은 동지가 이루지 못한 참뜻을 올 곧게 이어받아 안고 반미자주화 불길을 지펴갈 것이니 모든 아픈 시름을 내려놓으시고 평안히 잠드시며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기리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11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남일만 동지를 생각하면서

 

▲ 남일만 동지여! 동지가 걸어온 발자취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가셨기 때문에 서운한 마음 금할 순 없군요.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는데 동지의 걸어온 발자국을 상상하고만 있을 뿐이니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 김영승 기자

 

남일만 동지는 199251일에 운명했으며 매장번호 0-0-757이다.

남 동지는 공화국에서 내려왔다는 것만을 운명한 후에 알게 되었을 뿐 이력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앞으로 언젠가 알게 되면 발표할 것임을 알려드린다.

 

그러나 매장번호가 있으니 찾아 참배해야 한다.

 

남일만 동지시여!

 

동지가 걸어온 발자취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가셨기 때문에 서운한 마음 금할 순 없군요.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는데 동지의 걸어온 발자국을 상상하고만 있을 뿐이니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말을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지 궁금증을 가지면서 추모하는 마음 무어라 형언할 길이 없군요.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내려놓으시고 평안히 잠드시기 바랍니다.

 

202011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김원철 동지를 생각하면서

 

▲ 김원철 동지여1 동지의 마지막 생을 상기해 볼 때 지하 조직사업에서 초보적인 원칙조차 지키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온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 김영승 기자

 

김원철 동지는 191810월에 평북 신의주에서 출생했다.

 

1942년에 결혼하여 어머니와 아들을 두었다(세식구). 선박 관리 및 기관장으로 일명 바다 일꾼으로 살아왔다.

1960년에 내려 왔다가 61년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유는 같이 내려온 동료 중 한 분이 딸의 결혼식에 참가한 것이 화근이었다. 결혼식에 온 하객들 중 한 사람이 신부의 부친이 갑자기 나타난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신고하여 일행 4명이 체포되어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재판에서 검사는 사형을 구형하였으나 무기로 확정돼 징역을 살게 되었다.

 

1978년에 강제 전향에 걸려 조용히 살겠다고 한 것이 전향서가 되었다.

 

그 후 1984년도에 전주 감옥에 있을 당시 전향 취소를 제기했으나 대구 감옥으로 이감되어 878.15 사면조치로 출옥하게 되었다.

 

출옥 후 대구 사법보호소에 있을 때부터 노환으로 건강이 악화가 되어 치매 증상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나 식사도 못 하고 주위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등 병세가 극도로 악화가 되어 20061129일에 운명하고 말았다.

 

김원철 동지시여!

 

동지의 마지막 생을 상기해 볼 때 지하 조직사업에서 초보적인 원칙조차 지키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온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파란만장한 모든 아픈 시름을 접으시고 평안히 잠드시며 조국통일의 길 위에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830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김태수 동지를 생각하면서

 

▲ 김태수 동지여! 살아생전 자주 만나 지난날을 회고해 보면서 사는 세상을 쟁취하기 위하여 장소는 달라도 가는 길은 하나라 마음속에 담아 그리면서 오늘날까지 투쟁하고 있지만 그 거룩한 뜻을 이룩하지 못한체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말았으니 아픈 마음 금할 길 없군요.  © 김영승 기자

 

김태수 동지는 19271215일에 경북 선산에서 출생하였다.

1938년 어려서부터 공사장 막노동을 하기 시작했다. 김태수 동지는 공사장 막노동에 잔뼈가 굵어질 정도로 노동에 종사하였다

1950년 조국전쟁을 맞이했다.

19507월에 인민군에 의하여 해방을 맞아 의용군에 자진 입대하여 훈련을 받고 전선에 동원되었으나 9.28후퇴를 맞이했다. 그로 인해 북상하지 못하고 입산하여 빨찌산 투쟁을 전개했다.

1952년 적들의 대대적인 동기 제1차 토벌공세에 의하여 2월에 체포되었다.

526월에 무기형을 받고 대구 대전 등에서 수감 생활을 하였다.

196010월에 15년 형으로 감형을 받아 19678월에 만기 출옥했다.

1971년에 결혼하여 21녀를 두었다.

20002월에 제2차 장기수 송환 촉구 기자회견에 참가하여 송환의 뜻을 강력히 밝혔다.

그러나 송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03319일 오전 6시경에 운명하고 말았다.

 

김태수 동지는 우리 동지들 내에서 3태수라 불리었다.

 

동북 태수, 선산태수, 익산태수 등 동지들이었다.

그런데 이 3태수는 모두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 그러나 이름은 남아 영원히 불려질 것이다.

 

동북태수는 인민군 출신이고 선산과 익산태수 동지들은 빨찌산 출신들이다.

만일 영혼이 있다면 죽어서도 3태수 동지들이 살아생전처럼 만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상상하며 먼저 간 동지들의 얼굴이 선하게 비쳐 오기 때문에 그리워서 되씹어본다.

 

김태수 동지시여!

 

살아생전 자주 만나 지난날을 회고해 보면서 사람 사는 세상을 쟁취하기 위하여 장소는 달라도 가는 길은 하나라 마음속에 담아 그리면서 오늘날까지 투쟁하고 있지만 그 거룩한 뜻을 이룩하지 못한체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말았으니 아픈 마음 금할 길 없군요.

 

 

 

이젠 모든 아픈 시름 다 내려놓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830.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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