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수들의 묘소 참배 및 곡절 많은 혁명생애에 대하여-4

빨찌산 투쟁 업적은 조국의 청사에 길이 빛날 것

김영승 기자 | 기사입력 2020/11/06 [13:40]

장기수들의 묘소 참배 및 곡절 많은 혁명생애에 대하여-4

빨찌산 투쟁 업적은 조국의 청사에 길이 빛날 것

김영승 기자 | 입력 : 2020/11/06 [13:40]

장기수들의 묘소 참배 및 곡절 많은 혁명생애에 대하여-4

 

  © 김영승 기자


 

이준원 동지를 회고 하면서

 

 

이준원 동지는 1935116일에 함경남도 함주군 하기천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함주 상통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에 전념했다.

1953년에 인민군에 입대하여 서해 방어부대에서 근무하다 59년에 제대했다.

1959년에 방어부대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인민군 특수 정찰부대에 들어가 활동했다.

이 때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지만 홍역으로 잃고 마는 아픔도 겪었다.

19635월에 대남 사업에 동원되어 남으로 내려왔다가 북상 중에 체포되고 말았다.

15년 형을 선고받고 대전감옥을 거쳐 대구감옥으로 이감 와서 살다가 1979125일에 출옥했다.

출옥 후 목공 노동자로 전전하면서 출옥 당해 6월에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었다.

아들 며느리까지 보고 손주까지 두었다

 

이 동지는 6.15공동위 경북본부와 진보연대, 평통사 등에서 고문으로 있으면서 사회진보와 반미 자주화 투쟁에도 열심히 하다 201787일에 살아생전의 뜻을 이루지 못한 체 애석하게도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선생은 일차 송환 명단에 오르지 못한 자책 속에 제2차 송환 명단에는 올라 있으나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처자식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한을 품고 눈을 감고 마는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그리운 이준원 동지시여!

 

출옥 후 생사를 같이했던 동지들과 함께 항상 신념 속에 간직한 고향으로 올라가지 못한 죄책감 속에서도 마지막 생을 다할 때까지 자주 통일 운동에 몸을 담고 투쟁 속을 하다가 떠난 동지의 한생은 살아 투쟁하는 우리 후세들에게 마지막 생을 어떻게 장식해야 하는가를 산 역사적 교훈으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내려놓으시고 조국통일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11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김종하 동지를 추모하면서

 

김종하 동지는 19299월에 평북 영변에서 출생했다.

1945년 광복 후 민청과 지방 자위대에서 활동했다.

1950년 조국전쟁 발발 후 기계화 부대에 편입되어 전쟁에 참가했다.

경남 사천에서 미제 폭격으로 발목이 부상을 당해 야전병원에서 치료 중 후퇴를 맞이하여 남원까지 왔으나 북상하지 못하고 대둔산에서 충남 빨찌산 투쟁을 전개하였다.

김종하 동지는 용감하게 잘 싸워 충남도당 위원장 보위부대원으로 투쟁하였다. 그리하여 영웅칭호까지 받았다. 종하 동지는 충남도 빨찌산 투쟁에서 살아남아 소조 투쟁으로 신출귀몰하는 투쟁을 하다가 19551월에 체포되었다.

사형 구형에 무기로 확정되어 복역 중 196010월에 20년으로 감형을 받았다.

1975년 만기 때 출옥하지 못하고 반공법으로 7년의 추가형을 받고 도합 29년형을 마치고 198363일에 출옥했다.

 

김종하 동지는 끝까지 비전향을 고수하지 못한 죄책감을 같고 출옥 후 눈을 감는 그 날까지 처음에 가졌던 소신을 잃지 않고 투쟁하였으며 제2차 송환 명단에 올라 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애석하게도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특히 진주 mbc 빨찌산 다큐 제작에 힘을 쏟아부어 불구의 몸인데도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 지리산 뱀사골 기슭을 올라 증언하는 마지막 열성을 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6개 도당위원장 2차 회의 장소는 찾지 못했지만)

 

종하 동지시여!

 

동지의 조국전쟁 시기 빨찌산 투쟁에서 보여 준 용감무쌍한 투쟁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으나 감옥 투쟁에서 그 기백을 살리지 못한 아쉬움은 남아 있지만 마지막 생을 올곧게 장식한 동지의 한 생을 무거운 마음으로 회고하게 됩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 내려놓으시고 평안히 잠드시어 조국 통일의 길 위에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11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김난열 여성동지를 생각하면서

 

감난열 여성 동지는 1926년 인천에서 출생했다

조국전쟁시기 9.28 후퇴 때 북상했다.

1957년에 남쪽으로 내려와 1959년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 감옥에서 복역하다 1966년에 가석방되어 대구에서 생활하였다.

남쪽에 시댁 식구들이 살고 있으나 두려운 공포를 느껴 만남이 이루지지 못한 체 200152일에 복막염에 걸려 대구 곽병원에 입원하여 수차의 수술을 받았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2개월간의 힘겨운 투병생활 끝에 200172일에 운명하고 말았다.

 

공화국에는 남매를 두고 있다고 한다.

 

김난열 여성 동지시여!

 

단편적이나마 여성 동지의 한 생을 되씹어 볼 때 특히 여성 전사로서 겪는 말 못 할 고통만을 생각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해소하는 것은 일제에 이어 점령 통치하고 있는 미제를 하루라도 빨리 몰아내고 남녀 평등세상을 쟁취하는 것만이 지름길임을 재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잊으시고 평안히 잠드시며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기리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11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이학천 동지를 생각하면서

 

이학천 동지는 1928115일 평북 용천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부터 항일운동을 하던 큰형님의 영향을 받고 항일 자금을 전달하기 위하여 만주까지 오가기도 했다.

1950년 조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입대하여 최 전선에서 적들과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야전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928 후퇴를 맞았다.

 

북상하지 못하고 덕유산으로 입산하여 빨찌산 투쟁을 전개하던 중 전북 회문으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19528월 또다시 부상당하여 의무과 아지트에서 치료를 받던 중 적들의 토벌 수색작전에 걸려들어 체포되고 말았다.

재판에서 20년 형을 받고 대전, 대구, 김천 등 감옥에서 16년을 사는 과정에서 196010월 감형을 받고 1969년에 출옥했다.

출옥 후 목수노동자로서 전국을 돌며 주택을 건설하는 사업을 하면서 1973년에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 과정에 박정희 군사 파쇼정권은 1975년에 세기의 악법인 사화안정법을 제정하여 비전향수들을 비전향을 이유로 감호처분을 시켜 청주 보안감호소에 수감시켜 징역 아닌 징역 무기 아닌 무기로 하도 끝도 없이 구금시켜 전향 강요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

 

이학천 동지는 충농증으로 입안에 고름이 차서 아무 음식도 먹지 못하는 위증한 환자를 치료는 고사하고 전향강요만 당하고 있었다.

 

이학천 동지는 하는 수 없이 머리를 굽히고 1980년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동지는 대구 지역 각종 기자회견이나 집회에도 거의 빠지지 않고 참가하여 젊은이들을 격려하기도 했었다.

 

이학천 동지는 20101월에 담도암 판정을 받아 몇 번의 수술에도 효험이 없이 2010912일 오후 534분에 꿈에도 그리던 신념의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이학천 동지시여!

 

조국전쟁 시기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적들의 모진 탄압을 받는 과정에서 끝까지 극복해야 할 생사의 갈림길에서 극복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아픈 상처를 딛고 일어서 마지막 죽을 때까지 올곧게 살다간 동지의 한 생을 반추해 보면서 우리 후대들이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하는 것이 역사의 부름에 만 분의 일 이나마 보답하는 길인가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내려놓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111일 전국 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송영길 동지를 생각하면서

 

송영길 동지는 1929년 황해도 연백에서 출생했다.

 

조국전쟁 시기에 충남 대둔산에서 빨찌산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종하 동지와 함께 도당 위원장인 박우영 동지 보위 부대서 투쟁했다.

 

최 동지는 충남 마지막 빨찌산 성원으로 종하 동지와 함께 투쟁하다가 19551월에 천안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신출귀몰한 소조 투쟁으로 신문 지상에 회자되기도 했었다.

 

25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하여 건강이 극도로 파괴되어 몇 년 동안 마이홈 요양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다 2009314일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송 동지는 몸의 허약한 탓에 사회진보와 반미자주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못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송영길 동지시여!

 

출옥 후 마지막 생을 다할 때까지 송 동지의 생활을 회상에 볼 때 우리의 투쟁에는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재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초심을 잃지 않고 마지막 한 생을 장식한 것은 표본으로 남아 있으며 송 동지의 빨찌산 투쟁 업적은 조국의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니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내려놓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2020111일 전국묘소 답사반 일동 드림 

 

  © 김영승 기자

 

  • 도배방지 이미지

당창건 75돐 김정은위원장 연설문 전문
1/7
광고
광고
역사와 모범 많이 본 기사
Subquery returns more than 1 row
select uid,name,title,section,section_k,count+(select read_count from news_report where news_report.news_uid = ins_news.uid) as count from ins_news where (section='sc20' and wdate > 1604120457 ) and onoff='1' order by count DESC,uid DESC LIMIT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