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로동당의 역사적 뿌리

고유수 카륜 진명학교에서 진행된 카륜 회의에서 첫 당 조직인 <건설동지사> 조직

김현환 박사 | 기사입력 2020/11/06 [14:20]

조선로동당의 역사적 뿌리

고유수 카륜 진명학교에서 진행된 카륜 회의에서 첫 당 조직인 <건설동지사> 조직

김현환 박사 | 입력 : 2020/11/06 [14:20]

조선로동당의 역사적 뿌리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 자주일보

 

20201010일 조선인민은 그들의 정치적 참모부인 조선로동당 창건 75돌을 성대하게 경축하였다. 조선로동당은 19451010일 창립된 이래 75년간 조선인민의 자주성과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실현하기 위하여 온갖 노고를 다 바쳐왔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된 때로부터 3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인민대중이 주인 된 주체사회주의를 견결히 수호하고 사회주의 강성국가를 지향하여 계속 전진해나가고 있는 조선의 당당한 모습은 조선로동당의 뛰어난 영도력을 잘 말해주고 있다. 해방 후 현대 제국주의연합세력을 상대로 장장 75년간 맨 앞장에서 치열한 투쟁을 벌려온 조선은 수시로 달려드는 횡포한 적들의 전쟁책동을 막아내고 다시는 인민들이 전쟁의 참화를 당하지 않게 철저히 대비하여 왔다. 이것은 조선로동당이 이룩한 공적 중의 제일 큰 공적이다. 조선로동당은 인민군무력의 최정예화, 강군화와 전민항쟁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조선 식의 강력한 주체무기, 첨단무기 체계들을 계속 개발 보유하도록 함으로써 조선을 세계적인 군사강국으로 전변시키고 조선반도와 지역의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새 국면을 열어놓았다. 또한, 조선로동당은 조선의 융성번영과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튼튼한 자립적 경제토대를 마련하였다. 조선로동당의 현명한 영도가 있었기에 조선의 인민경제는 제국주의자들의 장기적인 제재 봉쇄에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물질기술적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불패의 조선로동당 역사는 19451010일 훨씬 이전인 김일성 주석이 새 세대 조선청년들과 항일혁명투쟁을 벌렸던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로동당의 당건설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당이 혁명에서 참모부의 역할을 수행하며 당의 역할에 따라 혁명의 승패가 좌우된다고 김일성 주석은 강조하였다. 혁명이 역사의 기관차라면 당은 혁명의 기관차라고 김주석은 주장하였다.

 

마르크스가 과학적 공산주의 이론을 창시한 후 실천 투쟁의 첫 사업으로 <공산주의자 동맹>을 창건하고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것이 그의 활동에서 가장 큰 공적으로 되는 것은 세계를 개혁하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에서 당이 노는 사명과 역할이 그만큼 중요한 의의를 가지기 때문이라고 김주석은 강조하였다. 공산주의가 새로운 시대사조로서 노동운동 무대에 출현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공산주의자들이 지구상에서 이룩해놓은 모든 세기적 변혁들은 그 어느것이나 다 <>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김주석의 견해였다.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새 세대 청년 공산주의자들이 주동이 되어 19261017일에 결성된 <타도제국주의 동맹, 약칭 ㅌ.>는 조선 공산주의운동에서 종전의 당과 구별되는 새형의 혁명적 당 창건을 위한 출발점으로 되었다. 모든 것이 <.>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김주석은 역설하였다. <.>는 반제, 독립, 자주의 이념 밑에 민족해방, 계급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새 세대 청년들이 역사의 진통 속에서 창조한 순결하고 참신한 새 형의 정치적 생명체였다. <.>가 발전하여 1927827<반제청년동맹>이 결성되었고 그 핵심으로 구성된 <조선 공산주의 청년동맹, 약칭 공청>1927828일 창립되었다. 공청이 키워낸 혁명의 핵심부대, 반제청년동맹이 이루어놓은 혁명의 대중적 지반이 곧 당 창건의 기초로 되었다. 공청이 창립되고 그것이 강력한 전위조직으로 혁명운동을 지도하던 나날에 새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은 선행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이 범하였던 잘못을 극복하고 대중전취와 영도예술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김주석을 비롯한 새 세대 청년 공산주의자들은 1930년 개최된 카륜회의에서 제시된 과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우선 당을 조직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공산당이 처음으로 조직된 것은 19254월이었다. <조선공산당>의 창건은 조선의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대중 속에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노동운동을 영도하여 우리나라 민족해방투쟁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영도되는 새로운 길을 열어놓았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조선공산당이 존재하는 기간 <6.10만세 시위투쟁>과 같은 큰 규모의 투쟁을 지도하여 민족의 기개를 과시하였으며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으로 <신간회>와 같은 대중단체도 만들어 반일애국 역량을 집결시키는 사업에도 이바지하였다. 조선공산당이 창건되고 그 영도 밑에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대중운동이 전개된 것은 우리나라 공산주의운동의 시초를 열어놓은 하나의 역사적 사변으로서 민족해방운동 발전을 일정하게 추동하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상층인물들의 파쟁으로 인하여 국제공산당은 1928년 여름에 개최된 제6차 대회에서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취소한다고 결정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조선공산당이 국제당에서 제명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김주석은 비록 나이도 어리고 공산주의 운동경험도 적지만 새 세대 청년 공산주의자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새 형의 당>을 창건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려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순결하고 참신한 새 형의 공산당을 창건하자니 여러 가지 장애와 난관을 타개해야 하였다. 가장 큰 난점은 공산주의 대열 안에 종파주의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었다. 조선공산당이 국제당에서 제명처분을 받은 후 우리나라 공산주의자들은 국내외에서 당을 재건하기 위한 운동을 치열하게 벌렸다. 그러나 일제의 무차별적인 탄압과 방해책동으로 어느 파벌도 재건에 성공할 수 없었다. 화요파와 엠엘파가 재건 운동을 포기하고 만주지방에 조직되어 있는 총국을 해체한다고 선언한 후 서상파가 국내에서 재건 바람을 일으켰지만 그것마저 노출되어 많은 당원들이 감옥에 끌려가는 것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여기에서 새 세대 청년 공산주의자들은 이미 해산된 당을 재건하거나 파쟁의 악습에 물젖은 기성세대에 의거해서는 혁명적 당을 창건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당을 창건하는 데서 제기되었던 다른 하나의 난관은 국제공산당이 제정한 <11당제 원칙>에 의하여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만주지방에서 독자적인 당을 창건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로 된 것이었다. 국제당은 제6차 대회에서 채택한 규약의 총칙에서도 국제공산당에 소속되는 개개의 당은 해당 나라의 공산당(국제공산당지부)이라는 명칭을 가지며 매개 나라에서는 하나의 공산당만이 국제당의 지부로서 존재할 수 있다11당제 원칙을 규정하였다.

 

국제공산당 동양선전부에서는 19305월 하바롭스크에서 <조중공산당대표회의>를 소집하고 조선공산당 조직문제에 대한 국제당의 결정을 통지해주었다. 국제당은 그 결정에서 재만조선인공산주의자들은 중국당에 가입하여 중국 당원으로서 활동할 데 대한 과업을 제기하였다. 조선당원이 중국당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문제는 민족적 자부심이 강한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에게 심각한 자극을 주었다. 이 원칙을 놓고 새 세대 청년 공산주의자들은 열기 띤 토론을 벌렸다.

 

김주석은 국제당이 <11당제 원칙>에 따라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중국당 가입을 요구하는 것은 비난받을 처사가 아니며 그 요구가 조선 공산주의자들에게서 당 재건의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동지들에게 강조하였다.

 

현재의 형편에서 국제당의 요구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다. 조선 공산주의자들에게 자기의 독자적인 정당이 있다면 구태여 무엇 때문에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하라고 요구하겠는가. 그러니 국제당의 결정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국제주의적 립장이다. 중국 당원의 모자를 써도 조선을 잊지 않고 조선혁명을 위해 싸우면 된다. 그러나 국제당의 지시대로 한다고 하여 독자적인 당 건설을 단념하고 무한정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할 수는 없다. 조선사람은 조선사람의 당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김주석의 견해가 <11당제 원칙>에 대한 국제당의 해석과 일치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는 11당제 원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당 건설 방침을 하루속히 확정하기 위하여 19306월 하순에 쟈쟈툰에서 국제공산당 연락원 김광렬(김렬)을 만났다. 김광렬은 일본에서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소련에 머물다가 나온 인테리였는데 새 세대 청년 공산주의자들의 활동구역인 고유수, 오가자, 카륜지방에 많이 와있었다. 그는 연락원의 신분을 가지고 김주석과 국제당과의 연계를 지어주려고 노력하였다. 김주석이 직접 그를 만나보니 그는 소문과 같이 박식한 사람이었다. 그때 김광렬은 김주석에게 자기의 개인적인 견해를 듣기보다는 국제당 할빈연락소를 소개해 줄터이니 거기에 가서 <11당제 원칙>에 대하여 토론해보라고 하였다.

 

김주석과 그의 동지들은 11당제 원칙이 한 나라에서 둘 또는 그 이상의 공산당이 국제당에 가입할 수 없고 오직 하나의 공산당만이 가입할 수 있다는 것, 한 나라에는 한 개 이상의 <공산당 중앙>이 존재할 수 없고 하나의 공산당 중앙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 원칙의 본질은 한 나라에 같은 이해관계와 목적을 가진 <당중앙>이 하나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국제당이 11당제 원칙을 내놓고 그것을 엄격히 이행하도록 요구한 것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종파주의를 비롯한 온갖 기회주의를 청산하고 대열의 통일단결을 보장하자는데 기본목적이 있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역사적 교훈은 국제공산당으로 하여금 11당제 원칙을 내세우고 공산주의운동 내에 여러 가지 이색적인 요소들이 침습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경계하게 하였다. 또한, 국제공산당이 11당제 원칙을 명시하게 된 것은 적들이 공산주의 대열을 내부로부터 분열와해시키려고 악랄하게 책동한 것과도 관련된다.

 

그런데 국제공산당 규약은 11당제의 원칙만 제시했을 뿐 다른 나라에 가서 공산주의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주재국의 당에 가입하는 방법은 어떻고 가입 후 그들의 혁명임무를 어떻게 설정하겠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만주지방에서 활동하는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당에 가입하는 문제가 그처럼 복잡한 논의를 불러일으킨 것도 바로 그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하여 일부 사람들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땅에서 자체의 당 조직을 꾸리는 것이 11당제 원칙에 모순된다고까지 파단하게 되었다.

 

이러한 혼돈의 시기에도 김주석은 당을 창건하기 위한 방도를 꾸준히 모색하였다. 국제당의 지시에도 부합되고 조선혁명도 강력히 추진시킬 수 있는 그런 길을 그는 꾸준히 모색하였다. 이런 모색 끝에 김주석은 선행공산주의운동의 교훈으로부터 출발하여 조급하게 <당중앙>을 선포하는 방법으로가 아니라 당 창건의 <조직사상적 기초>를 착실하게 다지고 그 토대 위에 명실공히 조선혁명의 참모부 역할을 수행 할 수 있는 당을 창건하려고 시도하였다. 계급적으로 각성되고 준비된 조직적 골간의 육성과 대열의 사상의지적 통일, 당이 의거할 수 있는 군중적 지반의 구축이 없이 주관적 욕망만으로는 당을 창건할 수 없다는 것이 김주석의 판단이었다.

 

김주석은 종파와 관련이 없는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기층 당조직>을 먼저 내오고 그것을 확대강화하는 방법으로 당을 창건하는 것이 그들 앞에 주어진 가장 적합하고 현실적인 창당방법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당을 창건하면 국제당에서도 환영할 것이라고 김주석은 확신하였다. 김주석은 지금까지 키워온 새 세대 청년 공산주의자들로 <핵심당조직>을 먼저 내오고 그 역할을 부단히 높여나가면서 그들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기층당조직>을 확대 강화해 나간다면 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지도도 능히 보장하고 그들에게 지워진 국제적 임무도 원만히 이행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중국땅 안에서 새 세대 청년 공산당원들이 <당중앙>만 따로 내오지 않는다면 국제당의 11당제 원칙에도 모순될 것이 없었다. 이러한 사상을 정립하여 김주석은 1930년 카륜회의에서 당 창건방침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새 세대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서 하나의 봉우리를 이루는 것은 <카륜회의>를 계기로 하여 조선혁명의 <지도사상>을 정립해놓은 것이었다. 카륜회의 결정에는 <.><공청>의 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길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원칙으로 삼아야 할 전략들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것은 새 형의 당을 창건하기 위한 사상적 기초로 되었으며 실패와 좌절의 진통 속에서 오랫동안 갈길을 찾아 암중모색하던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지침으로 되었다. 지도사상, 영도핵심, 군중지반, 이것은 당 조직을 내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새 세대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이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었다.

 

마침내 김주석과 그의 동지들은 193073일 카륜의 진명학교 교실에서 차광수, 김혁, 최창걸, 계영춘, 김원우, 최효일 동무들로 첫 당 조직을 무었다. 회의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김리갑, 김형권, 박근원, 리제우 동지들도 첫 당 조직 성원으로 되었으며 조선혁명군 대장으로 내정되어 있던 리종락과 박차석도 이 조직의 성원으로 되었다. 여기서 김주석은 긴 연설을 하지 않고 다만 당 조직성원들이 해야 할 과업으로 기층 당 조직을 확대하고 그에 대한 통일적 지도체계를 수립할 데 대한 문제, 대오의 조직사상적 통일과 동지적 단합을 확고히 이룩할 데 대한 문제, 혁명의 대중적 지반을 튼튼히 다질 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 실현방도로서 당 조직이 모든 활동에서 <자주적 입장>을 확고히 견지할 데 대하여 강조하였다. 여기서 당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지 않았다. <.>의 강령규약에 이들 공산주의자들의 최종목표와 당면투쟁과업이 명백히 밝혀져 있고 카륜회의에서 채택된 혁명노선과 전략적 방침들에 그들이 가야 할 길과 행동규범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첫 당 조직에 <건설동지사>라는 소박한 명칭을 붙이었다.그 명칭은 동지를 얻는 것으로부터 혁명의 첫 걸음을 떼였고 생사를 같이할 수 있는 동지들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결속시켜 혁명을 심화발전시키며 종국적 승리를 달성하려는 새 세대 조선 청년공산주의자들의 포부와 의지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첫 당조직, <건설동지사>는 조선노동당의 태아였고 씨앗이었으며 당의 기층조직들을 내오고 확대하는데서 모체적 의의를 가지는 조직이었다. 첫 당 조직을 가지게 된 때로부터 조선혁명은 종파의 물을 먹지 않은 깨끗하고 참신한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의 영도를 받으며 계속 발전하여 왔다. 자주적인 당 건설을 위한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은 이때로부터 항일대전의 도도한 흐름을 타고 줄기차게 진척되었다. 그 후 그들은 <건설동지사> 성원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두만강 연안의 북부조선 일대와 만주의 여러 지역에 당 조직들을 내왔다. 국내에 당조직들을 내오는 일은 김주석 자신이 직접 맡아 하였다. 김주석은 1930년 가을에 그들의 영향이 비교적 강하게 미치고 있던 함경북도 온성군에 나가 당 조직을 하였다.

 

새 세대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청소한 당 조직들은 인민대중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언제나 그들의 선두에서 항일전쟁의 진군로를 헤쳤으며 그 과정을 통하여 강철의 전위대오로 단련되고 군중의 절대적인 사랑과 신임을 받는 불패의 역량으로 자라났다.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은 자기의 독자적인 당 조직을 가지고 활동하면서도 중국 당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사업하였다. 그들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이지만 조중 두 민족의 유구한 선린관계와 두 나라가 처한 처지의 유사성, 두 나라 혁명가들이 짊어지고 있는 시대적 사명의 공통성으로부터 시종일관 중국혁명을 지지해주었으며 중국이 자기 민족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에서 승리를 거듭할 때마다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였으며 그들이 일시적인 실패와 곡절을 겪을 때면 그들과 함께 가슴 아파하였다.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땅에서 활동하는 상황에서 중국 당과 연계를 가지지 않고서는 중국 인민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으며 <반제 공동전선>을 튼튼히 유지해나갈 수 없었다.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당과의 연계를 중시한 것은 만주성위산하의 중국 당 조직들에 조선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정과도 관련된다. 동만 특위에도 조선사람들이 많이 들어가 있었고 동만 지역의 현 당위원회와 구당위원회 지도부도 절대다수가 조선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당원비율에 있어서도 90프로 이상이 조선사람들이었다.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동만지역 당 조직에서 주도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만주지방에 조선인 당원들이 많은 것은 간도지방에서 공산주의운동을 개척한 선구자들의 대다수가 조선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김주석이 중국공산당과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만주를 강점한 후부터였다.

일제가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강점함으로써 일제가 조중인민의 공동의 적으로 된 새로운 환경은 새 세대 조선 공산주의자들과 중국공산당과의 연계문제를 성숙된 요구로 내세웠다. 1931년 겨울 명월구회의를 전후한 시기에 김주석은 처음으로 중국공산당 조직과 연계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중국공산당과의 연계를 맺으면서 이 과정에 김주석은 중국 공산당조직의 간부로도 활동하였다. 중국공산당의 동장영이 희생된 다음에는 위중민과 연계를 가지었다. 중국 공산당과의 이러한 관계는 항일무장투쟁의 전 기간 유지되었으며 그것은 일제를 반대하는 공동전선을 확대하고 공동투쟁을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공산당과의 깊은 연계 밑에 공동투쟁을 발전시켜나간 것은 그들이 남의 나라 땅에서 혁명투쟁을 하지않으면 안 되었던 당시의 복잡한 정세와 <11당제>에 관한 국제당노선의 요구에 부합되는 주동적이면서도 신축성있는 조치였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국 공산당과의 이러한 공동투쟁을 적극 발전시키면서 시종일관 조국해방의 기치,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견지하였으며 그것을 빛나게 관철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원칙적인 입장과 성실한 노력에 대하여 중국의 전우들은 혁명의 민족적 의무와 국제적 의무를 올바로 결합한 뚜렷한 모범으로 된다고 진심으로 칭찬하였다. 수천수만을 헤아리는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 딸들이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 기치를 높이 추켜들고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간고하고 시련에 찬 항일의 대장정에 참가하였다.

 

1963년에 최용건동지가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주은래 총리는 심양에서 그의 생일을 축하하여 연회를 마련해주고 인상깊은 축하연설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동북혁명을 개척하는 데서 조선사람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래서 <중조친선>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고 영원한 것이다. 항일연군은 중조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의 연합된 혁명무력이었다.”

 

동북혁명을 개척하는 데서 조선사람들의 공로가 많았다는 데 대해서는 중국의 양정우, 주보중, 위증민 동지들도 자주 이야기하였다고 김주석은 회고하였다.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중국혁명을 위해 사심없이 도왔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도 김주석과 그의 동지들의 일이라면 생사를 가리지 않고 성심성의로 도와주군 하였다.

 

반일조선인민유격대가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된 후 새 세대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유격대 안에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를 내왔다. 그것은 카륜에서 조직된 첫 당조직의 확대발전으로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그들의 자주적인 당조직은 그후 <조국광복회> 국내조직인 조선민족해방동맹과 농조, 노조들에도 뿌리를 내리었다.

 

새 세대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조국에 개선한 후 한달도 못되는 짧은 기간에 당창건의 위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항일혁명의 장구한 나날 당 건설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정에서 이룩한 성과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김주석은 감회 깊게 추억하였다.

 

이처럼 항일혁명에 뿌리를 두고 발전해온 조선로동당의 현명한 영도가 있고 오래동안 다져온 자립적 경제토대와 힘찬 과학기술 역량이 있으며 애국 열의로 불타는 인민대중의 창조적 힘이 있기에 조선은 점령못할 요새가 없다. 자력자강, 계속혁신, 계속전진, 연속공격 정신을 높이 발휘하며 불패의 조선로동당은 오늘 조선을 세계에서 가장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주의 문명강국으로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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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창건 75돐 김정은위원장 연설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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