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자 농민열사 26주기 추모제

김영승 종군기자 | 기사입력 2019/09/10 [14:37]

김영자 농민열사 26주기 추모제

김영승 종군기자 | 입력 : 2019/09/10 [14:37]

 

<김영자 농민열사 26주기 추모제 >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서)

 

 

▲     © 자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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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자 동지의 삶과 죽음

 

사람이 태어나 일생을 살다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

 

그래서 생자필멸이라 했다. 그 누구도 생물학적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뜻이다. 허나 정치적 생명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자들의 가슴에 부활하여 영생불멸하기도 하고 뜻 없고 가치 없게 산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의 저주 속에 이슬처럼 사라져 버리고 만다.

 

특히 남한의 경우 일제와 미제의 두 제국주의 밑에서 조국과 민족, 민중의 삶은 아랑곳없이 일신의 안일만을 추구하며 뼛속까지 친일, 친미로 가득 차 배신과 배족을 하는 범죄행위로 일생을 마치는 가련한 자들도 있다.

지난 8일 마석 모란공원에서는 평생을 민족의 자주와 통일, 민중의 해방을 희구하며 살다 영원히 우리 가슴 속에 부활한 김영자 동지의 26주기 추도식을 열고 동지를 추모하였다. <편집자 주>

 

김영자 동지는 66년 서울대 농대 가정학과를 졸업한 뒤 정읍 농고에서 후학양성에 힘쓰다가 69년 대학 시절부터 고민해 온 고된 농사일과 봉건적 억압에서 고통 받고 있는 여성 농민의 권익향상을 몸소 실천하기 위하여 서울 상계동에서 비닐하우스 시설 원에 들어가 농사를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농업을 살리고 예비농업인의 실습장이자 농업기술지도소 더 나아가서는 예비농민의 어머니로서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시작했다.

 

75년 지역에서 지역 탁아소와 어머니 자치 활동으로 작은 공동체의 모범을 만들었고 77년 에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가톨릭 농촌 여성회 설립에 산파 역할을 올곧게 수행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가톨릭 여성회는 85년 가톨릭 여성농민회로 성장하여 다시 회장을 맡아 열성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후 동지는 성남에서 지역 운동을 지도하여 각종 연합단체의 공동대표로서 80년 민주화운동을 지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노태우 정권 때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남편이자 동지인 김준기 선생의 옥바라지와 자녀교육 등으로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90년 성남 큰우리소비자협동조합이사장으로 농촌운동과 소비조합 운동에 헌신하는 과정에 93년 갑작스런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93911일 애석하게도 운명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김영자 열사의 고귀한 생을 돌이켜 보면서 민중들의 권익향상과 조국의 자주화 통일운동에 힘차게 매진하는 길만이 열사의 참뜻을 이어받는 것이라 다짐하면서 추모의 정을 나누었다.

 

 

김영자 농민열사의 양력

 

19443/2일충남 출생1963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농가가정학과 입학.

1966대학 졸업 후 정읍농민고등학교 교사로 3년간 재직

19693월상계동에서 비닐하우스시설원에 농사 시작.

1975년 지역 탁아소 인원터 어린이집 운영.1977-1978 카토릭 농촌여성회 초대회장.

1986년 성남 민주화운동연합 여성분과 위원장으로 활동.

1989년 경기도 여성농민회 총무.

1990큰우리 소비자 협동조합이사장으로 활동.

1993년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

19939/11일 오전 930분 운명했습니다.

 

경과 보고

이곳 모란공원에는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희생된 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추모제 전에 1시간 정도 공원 내에 있는 열사묘역을 참배하고 김영자 열사 추모제를 올리는 것입니다.

 

오늘 추모제는 민족문제 연구소 경기지부, 한민족 독립정신 연구회, 성남 용인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성남 평화의 소녀 지킴이 모임이 공동으로 준비하여 지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범민련도 함께 했습니다.

 

앞으로도 김영자 열사와 뜻을 같이하는 많은 분들과 함께하는 추모제가 될 것을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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